- 본문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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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세조 시기 태실 조성은 기존의 관례에서 벗어난 경우가 많았는데, 정희왕후(貞熹王后)의 태실 사례가 그렇다. 조선 초기 만해도 왕비의 태실이 조성되었는데, 현재까지 확인된 왕비의 태실은 ▶영주 소헌왕후 태실 ▶홍천 정희왕후 태실 ▶예천 폐비윤씨 태실이 있다. 그런데 소헌왕후와 폐비윤씨의 태실에서는 가봉 태실의 흔적이 남아 있는 반면 정희왕후의 태실에서는 관련 흔적이 전혀 발견되고 있지 않다. 물론 정희왕후의 태실이 있다는 기록은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보면 정희왕후의 태실은 홍천 공작산에 있고, 『성종실록』의 교차 검증을 통해 정희왕후가 홍천의 공아(公衙)에서 태어난 것이 확인된다. 다만 별도의 가봉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데다 태실지로 추정되는 수타사 뒷산과 덕치천 건너편 태능산에서도 가봉 태실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앞서 소헌왕후의 태실을 가봉했던 전례가 있기에 세조 역시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정희왕후 태실에 대한 가봉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정희왕후의 태실에 대한 가봉 기록이 없는 것은 세조가 태실의 가봉에 대해 의지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하나의 사례는 광릉(光陵)의 조성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세조는 자신의 능과 관련해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石室)과 석곽(石槨)을 마련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러한 유언은 왕릉 공사에 동원되는 백성들의 부역을 경감해주기 위한 것으로, 이는 태실의 조성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는 백성들의 고충을 헤아린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기존까지 하삼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태실의 조성이 세조의 이 같은 인식 속에 한양에서 가까운 경기도에 태실을 조성하는 것으로 변화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46~4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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